| 자연과 어우러진 공동체를 위한 건축
벽을 넘기 위해서는 한번쯤 말도 안 되는 방법으로 단숨에 기존 개념을 바꾸는 방식이 필요하다. 여기서 '말도 안되는 방법' 은 일종의 "싱귤러리티 이론", 특이점이라 불린다.
과거 공동체 중심의 사회에서는 우연성이 삶을 지배했다. 우연히 해당 장소에 태어나 맞선으로 생전 모르던 사람과 결혼했다. 즉, 인생의 중요한 선택이 우연에 의해 결정된 셈이다. 하지만 인공지능과 데이터가 선택에 개입되는 사회에서는 우연보다 필연이 지배한다. "우연성"은 애당초 데이터에 의해 걸러지며, 공통된 관심사와 주제에 따라 필연적인 선택이 강요된다.
| 미래: 자율지향 사회
자본주의 사회는 강한 연결(필연)을 기반으로 성장했다. 자본을 거래함에 있어, 계약이 아닌 우연과 같은 약한 연결은 위험성이 뒤따른다. 그래서 자본주의 사회는 암묵적으로 '우연'을 악으로 규정하며 은근슬쩍 (우연은) 부정적인 것임을 강조해왔다. 하지만 인간은 본래 우연적인 존재다. 뇌에 로봇이 탑재되지않는 이상, 인간은 완벽하게 합리적인 행동을 할 수 없다. 가령, '변덕을 부리는 욕구'를 제거해버리면 우리가 먹는 음식들은 사료가 된다. 감정 탓에 불완전하기 때문에 인간은 여러가지 음식들을 만들어내며, 여러 호불호를 통해 살아갈 이유를 갖는다. 즉, 기계와 같은 100% 완벽성과 합리성을 기반으로 하는 필연적인 사회는 인간을 가축으로 만든다.
그러므로 특이점 '싱글러리티'는 필연에 지배되지 않으려는 가운데 찾아오게 된다. 이는 데이터로 무장한 완벽주의 속에서 우연이 발생하는 식이며, 감정을 갖는 인공지능 '(새로운 인간)뉴타입'이 바로 특이점이 된다. 이에 대한 불안함은 각종 소설과 영화로 만들어졌는데, 실제 그 불안함이 현실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인간성'이란 결국 우연에 의해 지배되는 불완전함을 의미하는데, 불안한 인간의 감정을 구사하는 기계가 어떠한 일을 저지를 지는 아무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인간성을 극대화 할수록 인공지능의 완벽함이 떨어지는 일종의 모순적인 상황이 발생한다.
하지만 인간은 인공지능을 통해 '자동화'된 기계들을 '자율화' 된 기계로 재창조할 가능성이 높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결국 우연이 허용되는 열려있는 자유주의 사회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 미래예술·문학: 생각지향 사회
디지털 기술의 발전은 필연성이 온 세상을 지배하도록 만들고 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조용히 시사점을 던지는 학문이 바로 예술과 문학이다. 예술은 결국 철학과 연결되므로 인공지능과 같은 과학기술과 큰 차이를 갖는다.
우선, 철학은 정답이 없다.(기계학습이 안됨) "왜 살인을 하면 안 되는가?"라는 질문에도 철학은 사실상 명쾌한 답을 주지 않는다. 대신 철학은 생각하도록 만든다. 그래서 데이터 양이 증가할수록 철학은 더욱 빛을 발휘한다.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요컨대, 철학의 본질은 수수께끼이며 우연성이 핵심이다.
가령, 철학을 종교와 비교했을 때, 종교는 우연보다 필연에 가깝다. 교리에 따라 이미 정해진 규율을 지켜야 하고, 종교에서 정한 약속은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즉, 종교는 신과 인간의 약속이다. 반면, 철학은 최소한의 약속조차 없다. 누구를 구원하거나 지켜주지도 않으며, 세상 만물에 관한 의문일 뿐이다. 그래서 철학의 본질은 수수께끼이며 우연을 허락한다. 또, 문학 역시 철학에 기인한다. 우리가 특정 작가의 작품을 읽는 이유는 해당 작가의 글로 인해 가치관이 흔들렸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흔들림'의 뿌리는 철학에 있으며, 흔들림은 감정에 담겨 전달될수도(소설) 있고, 글 자체로 전달될 수도 있다. 어쨌든 작가의 작품이 독자를 흔들기 위해서는 철학이라는 전제가 필요하며, 철학은 답이 없는 그야말로 난제와 같은 질문이기에 철학에 기인한 문학작품은 독자에게 근원적 뿌리에 대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그러므로 철학에 기인한 예술작품은 답이 없는 질문을 던짐으로써 보는 사람의 정신세계에 충격을 안겨준다. 단, 예술은 단순히 「살인, 선정성, 폭력」이 아닌 근원적 세계에 관해 해석을 다르게 함으로써 충격을 준다. 다시 말해, 필연적인 세계를 다시 우연으로 돌림으로써 발생하는 충격이 바로 철학이며, 문학과 예술은 그 결과물이다.
철학과 문학 그리고 예술은 사람이 존재하는 이상, 미래에도 그대로 존재한다.
| 자본주의 말기: 반근대 경제
비정부 기구 옥스팜 발표에 따르면, 매년 세계의 양극화가 더욱 극명하게 벌어지고 있다. 2017년 1월 기준으로 세계 상위 8명과 하위 50퍼센트의 재산 규모가 같다. 빌 게이츠, 워렌 버핏, 등.. 세계 상위 8人이 보유한 자산의 합계는 대략 4,260억 달러인데, 세계 인구 73.5억 명 중 하위 36.8억 명이 갖고 있는 자산의 합계가 약 4,000억 달러이다. 즉, 세계 인구의 하위 36.8억 명의 1인당 자산은 116달러밖에 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와 같은 빈부격차는 생산력으로 설명할 수 없다. 상위 8명의 생산 능력이 36.8억 명의 생산량보다 뛰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사람의 생산능력이 2~3배 가량 차이나는 경우도 드물다.
문제는 빈부 격차가 점차 커져가고 있다는 점이다. 2010년 시점에서 세계 인구의 절반(34.7억)이 가진 자산의 총합과 상위 388명의 자산 총합이 비슷했으며, 388명은 8명(2019)이 되었고, 결국 8명은 1명이 될 것이다. 이 상태로 간다면 세계의 계급화가 급속히 진행될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의 꽃은 기업이며, 사실상 꽃이 중요한 이유는 열매 때문이다. 하지만 노동자와 경영자의 임금 격차가 불합리할 정도로 확대됨으로써 근로자는 꽃을 감상하는 수준이 되었다. 노동자와 경영자의 임금격차만큼 노동자의 능력이 어느 시점부터 하락하고, 반대로 경영자의 능력은 급격하게 향상됐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사사정이 어려우면 구조조정의 대상 1순위는 노동자이며, 경영자는 오히려 상여금을 많이 받는다. 이렇게 엄청나게 비대해진 자본은 결국 중앙을 향해 몰려 들어 중심이 엄청나게 커졌다. 그런데 중심이 번영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주변이 존재해야한다. 현 추세대로 주변을 쥐어짜며 중심이 커져가면 결국 자본주의는 끝이 날 수밖에 없다. 어떤 생명도 우주까지 무한으로 성장할 수는 없다. 성장을 외쳐도 결국 언젠가는 한계에 도달해서 반근대의 시대가 될 것이다.
이제 "더 빨리 더 멀리 더 합리적으로"라는 근대 사회의 원리에서 벗어날 때가 왔다. 반대로 "더 느리게 더 가까이"를 실현해야 하며, 느리게 유지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식회사가 현금 배당을 그만둬야 한다. "더 멀리"라는 원칙 아래서는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이라도 주주가 되면 경영 개입이 허용된다. 그러나 자본과잉 상태는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에만 관심있는 사람에게 자본을 제공받을 필요가 없어진다. 가까운 주주로 충분한 경제가 자본주의를 살릴 수 있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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