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낭만주의 그로테스크
그로테스크는 17~18세기에 이르러 기괴함, 공포에 유머와 모순적 대비를 첨가했다. 이후 낭만주의에 이르러 또 하나의 개념과 기법이 추가되는데, 그것은 바로 '환상적 아름다움'이었다. 여기서 '환상적 아름다움'은 일반적인 아름다움과 다르다. 아름다움에 환상이라는 용어가 붙었다는 것은 환각, 무질서를 내포한다.
빅토르 위고는 낭만주의 그로테스크를 분석하며, 그로테스크는 소름 끼치는 기이한 유머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위고에 의하면, 아름다움에는 오로지 하나의 형태가 존재하는 반면, 추함은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 즉, 아름다움은 단순하며 간단명료한 형태의 질서에 있는 반면, 추함은 다양성에 기초한다. 그리고 그로테스크는 단순하고 간단한 형태의 질서가 아닌 다양하고 모순적인 무질서를 지향했기에 그로테스크는 다소 기형적이며 다양한 추함을 통해 아름다움이 추구하는 형태를 만들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예술이 아름다움을 추구한다는 가정하에 '아름다움'이 완성되려면, 추하다고 느낄 수 있는 주변이 존재해야한다. 어두움이 있어야 밝음이 있듯이 아름다움 역시 비교할 수 있는 추함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한편, 그로테스크는 수없이 다양한 무질서와 추함 속에서 단 하나의 아름다움을 추가하는 것만으로 생경한 느낌을 자아낸다. 또,이렇게 극명한 대비를 통해 가상의 세계를 순식간에 무너뜨림으로써 현실에 존재하는 모순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이는 감상자로 하여금 아득한 느낌을 줄 수 있는데, 확실하다고 믿던 순간에 세계의 질서가 파괴되면, 순식간에 아득한 나락의 입구가 열리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가상세계 속의 또다른 환상인 셈이다. 즉, 그로테스크는 단순히 현실을 파괴하는 희곡(가상세계가 무너지더라도 현실에 머무르게 한다)과 달리 근본적인 질서를 무너뜨림으로써 발밑이 아득해지는 불안을 야기한다.
그리고 낭만주의 그로테스크 양식은 기괴함과 생경한 무질서에 뜬금없는 아름다움을 첨가함으로써 환상적인 느낌을 만들었다. 그러고나서, 근원적인 불안을 야기할 정도로 이 세계가 추구한 질서를 파괴했다. 이때, 낭만주의 그로테스크가 무너뜨린 질서는 단순히 극중 조직이나 집단의 체계가 무너지는 것과 차원이 달랐다. "사람이 살아가야 될 이유", "인간이란 존재와 관계", "법체계와 자연질서", 등.. 인간 본연의 심층적인 논제를 던짐으로써 엄청난 불안을 야기했다. 이로써 그로테스크를 접하는 사람은 지금껏 자신이 확신하고 있는 세계관, 안전하게 자신을 둘러싸고 있다고 믿어 온 전통, 인간 공동체로부터 내팽겨쳐졌다.
낭만주의 시대의 그로테스크의 대표적 작가로는 "단편 야화"로 유명한 호프먼과 스콧 그리고 애드거 앨런 포가 있다. 호프먼은 형태의 변형을 통해 괴상하고, 기형적인 느낌을 자아냈다. 그의 소설에서 식물의 꽃은 사람의 얼굴이나 동물로 변했고, 사람은 식물이나 동물로 변신했다. 반면, 스콧과 애드거 앨런 포는 "형태가 아닌 작품을 지배하는 분위기" 혹은 "불합리하며 환상을 야기하는 초현실적 생경한 세계"를 통해 그로테스크를 표현했다. 특히 애드거 앨런 포의 경우, '그로테스크'문학에 갖는 경멸조를 누그러뜨렸는데, 그는 인간세계의 것과 완전히 동떨어진 분위기를 묘사하여 음산하고 환상적인 세계를 창조했다. 애드거 앨론 포는 '죽음'이나 '변형'에 관해 단순히 초현실적인 상상으로 얼버무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로테스크가 무색해질 정도로 정밀하고 사실적인 장면을 묘사했다. 가령, 호프만의 소설은 보이지 않는 불가사의한 힘이 등장하지만, 애드거 앨런 포의 소설에서는 추리력을 가진 사람들이 초현실적인 사건에 맞서며 추적에 나선다. 그 결과, 애드거 앨런 포의 소설은 미스터리 소설의 원조가 되며 그로테스크의 범주를 벗어났다. 하지만 초기 애드거 앨런 포의 방식은 그로테스크 작가였던 호프만의 영향을 받았기에 미스터리 소설 역시 그로테스크에서 출발했다고 볼 수 있다.
3-1 사실주의와 그로테스크
낭만주의 후기에 이르러 그로테스크는 사실주의와 결합한다. 이에 대해, 뷔히너는 자신의 소설 "렌츠"에서 다음과 같이 평했다.
작품에 생명이 깃들어 있다는 느낌은
아름답고 추함을 초월해 예술에서 단 하나의 평가기준이 된다
위와 같이 뷔히너가 주장하는 예술작품의 평가기준은 사실주의를 거쳐 초현실주의와 아방가르드를 탄생하는 기반이 된다.
개개인이 지닌 고유의 본질을 꿰뚫기 위해서는 인간에 대한 애정이 필수적이다.
누구도 얕보거나 추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다.
-뷔히너-
뷔히너의 미학적 관점에 의하면, 특정한 작품이 예술성을 갖기 위해서는 일정한 형태와 일관성이 뚜렷해야 한다. 그러므로 작품에 통일성을 부여하기 위해서라도 작가는 반드시 현실에 투영된 관점을 취해야 한다는 것이 뷔히너 미학의 핵심이었다. 그래서 뷔히너의 작품은 현실과 동떨어져 존재하지 않는다. 예술이 굳이 아름다움을 추구할 필요는 없으며, 작가의 개성이 현실적 토대위에서 상상력을 발휘할 때 비로소 아름다움을 갖기 때문이다.
마침내 달에 도착해 보니 달은 썩은 나뭇조각일 뿐이었단다.(...)해에 도착해 보니 해는 시든 해바라기일 뿐이었고, 별들로 가 보니 작은 황금빛 모기들이었단다. 붉은등때까치가 자두나무에 박아 둔 먹이처럼 모기들은 하늘에 박혀 있었지. 지구로 되돌아가려 했지만 지구는 이미 깨진 항아리같이 뒤죽박죽이었단다. 아이는 완전히 혼자였어. 아이는 주저앉아 울어 버렸지. 그리고 아직까지 그 자리에 홀로 앉아 있단다.
뷔히너의 작품은 마치 동화와 같다. 기괴함과 초현실보다 다소 환상에 가깝다. 하지만 현실적 토대위에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는 점에서 분명 낭만주의와 사실주의의 접점에 위치했다. 이처럼 사실주의에 기반한 초현실주의적 뷔히너의 관점은 이후 19세기를 거쳐 사실주의적 그로테스크 양식을 만든 '켈러', '라베', '피셔', '부슈'에 영향을 준다.
19세기의 사실주의 그로테스크 작품은 상황묘사가 지극히 사실적이다. 소재 역시 현실과 동떨어진 세상을 창조하는 방식이 아닌 일상생활에서 흔한 것들이다. 대표적으로 켈러의 '젤트빌라 사람들'을 보면, 대략 사실주의 그로테스크 문학의 느낌을 알 수 있다.
옆방의 문을 열자 조상들을 모신 커다란 홀이 나타났다. 방은 바닥에서 천장까지 빽빽이 초상화로 채워져 있었다. 바닥에는 다양한 색깔의 육각형 타일이 깔려 있었고 석고로 된 천장에는 실물 크기의 인간과 동물의 형상, 과일 화환과 휘장들이 거의 공중에 떠 있다시피 새겨져 있었다. 또한, 열 척 높이나 되는 벽난로의 거울 앞에 키가 작고 체구는 새끼염소만 한 백발의 노인이 진홍색의 벨벳 잠옷을 입고 얼굴에는 비누거품을 칠한 채 서 있었다. 그는 성마르게 허우적거리고 울부짖으며 외쳐 댔다.
`면도를 할 수 없어! 면도를 못 하겠다고! 면도칼이 들지 않아!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는다니까!
오, 맙소사, 오 맙소사!`
사실주의 그로테스크 문학은 더이상 '악마'나 '비현실적인 힘'에 의해 주인공들의 상황이 변하지 않는다. 그들의 운명을 좌우하는 것은 일상적인 상황에서 발생하는 모순이다. 과거와 달리 악마나 괴물에 의해 기괴한 분위기가 만들어지지 않고, 등장인물이 지닌 기질과 행동이 악마의 기괴함을 대신한 것이다. 따라서 상황묘사와 인물묘사가 상당히 치밀하며 사실적이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라베(Wilhelm Raabe)의 "슈페를링 거리의 연대기"를 보면 생경한(낯선) 분위기를 만드는 뭔가가 빠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왠지 낯설다.
한때는 틀림없이 다리가 네 개였을 터이나 지금은 세 개만 남은 책상이 이 안락의자 가까이에 세워져 있었다. 빈 맥주잔과 반쯤 비어 있는 담뱃갑, 작은 재료 접시, 낙서가 휘갈겨진 종이, 그 밖에 이질적인(!) 물건들이 지극히 흥미로운(!) 모습으로 뒤섞여 책상 위를 빼곡히 채우고 있었다. 방 안에는 모양이 제각각인 의자 세 개도 있었다. (...) 한쪽 구석에는 산책하기 좋아하는 이 캐리커처 화가의 지팡이가 세워져 있고, 그 꼭대기에는 챙이 넓은 펠트 모자가 걸쳐져 있다. 커다란 여행 가방을 걸어 놓은 다른 쪽 구석의 벽에는 기괴한 스케치들이 압정에 꽂힌 채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모든 것이 그야말로 유머와 기이한 모순의 뒤죽박죽이었다.
위와 같이, '켈러'나 '라베'가 강조한 사실주의 문체는 기괴하고 심연의 공포가 그려지는 그로테스크의 속성을 무뎌지게 만들었다. 등장인물의 알 수없는 심리와 행동이 기괴함을 유발하지만 이를 묘사하는 과정은 마치 극사실주의 작품과 비슷하다. 이는 그로테스크와 극사실주의 작품과의 경계를 희석시켰고, 급기야 '시스템(알고리즘)'을 도입하는 '피셔'와 '부슈'와 같은 스타일을 탄생시켰다.
예컨대, '피셔'와 '부슈'의 그로테스크는 현대예술에 있어 가장 큰 영향을 줬던 그로테스크 양식이 아닐까한다. '피셔'는 마치 컴퓨터 프로그래밍과 같은 알고리즘 방식을 그로테스크에 접목시켰다. 피셔의 작품을 보면, 현실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우연이 논리적으로 끝없이 연계되며 비현실적인 상황을 발생시킨다. 그래서 피셔의 작품은 알고리즘을 보는 느낌이며, 부분적으로 인간적이지만 전체적으로는 초현실적인 기괴함을 준다. 그리고 이와 같은 피셔의 방식은 그로테스크 분야의 혁신이 되었고, 피셔의 방식을 가장 완벽하게 구사한 그로테스크 작가 '부슈'를 만들었다. 우선, 피셔의 작품의 감상해보자.
나는 내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어느 결혼식 피로연에 참석하게 되었다. 온갖 음식으로 뒤덮인 커다란 은쟁반이 내 앞으로 날라져 왔다. 나는 쟁반의 가장자리가 탁자 바깥으로 약간 튀어나와 내 가습 쪽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옆에 앉아 있던 부인이 포크를 떨어뜨려 그것을 집어 올리려는 순간이었다. 내 정장의 단추 하나가 악마처럼 교활하게 쟁반 아래로 기어 들어가더니 내가 재빨리 상체를 일으키는 순간 갑작스레 그것을 뒤집어 버렸다. 쟁반 위에 있던 소스와 온갖 절임류, 그중에 있던 검붉은 액체까지 모든 것이 와장창 소리를 내며 나뒹굴거나 흘러내리거나 탁자 위로 흩어졌다.
나는 허둥지둥 어찌해 보려다가 포도주 병을 쳐서 넘어뜨렸다. 내 왼쪽에 앉아 있던 신부의 새하얀 웨딩드레스 위로 포도주가 쏟아졌다. 일어서려던 나는 오른쪽에 있던 부인의 발가락을 세게 밟고 말았다. 누군가 도와주려 손을 내밀다가 채소 접시를 뒤집고, 다른 누군가는 유리잔을 넘어뜨렸다.
아,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자 난리법석이자 비극적인 대참사였다. 온갖 무상한 것으로 이루어진, 가뜩이나 부서지기 쉬운 이 세상이 완전히 산산조각 나려는 참이었다. 비장함이 나를 사로잡았다. 일단 나는 샴페인병을 들고 창가로 다가가서는 창문을 열고 병을 높이 쳐들었다. 신랑이 내 팔을 잡았다. 화가 치솟고 분노가 들끓었다. 신부는 거의 졸도할 지경이었다. 더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상황이 우스꽝스러운 지경에까지 이르렀기 때문이다.
단추로 시작해서 전체를 망쳐놓는 분위기는 마치 삼류 유머소설과 흡사하다. 그러나 피셔의 작품은 단추가 불러일으키는 연쇄작용으로 인하여 세상이 멸망하는 상태까지 나아갔다. 이와 같이 거대한 시스템이 붕괴되는 시발점이 주변의 작은 소재가 되는 방식은 그로테스크 외의 분야까지 새로운 기법으로 불리며 반향을 일으켰다. 가령, 피셔의 방식을 가장 잘 흡수한 「빌헬름 부슈」는 피셔처럼 과장된 사건없이 차분한 묵가적인 분위기로 그로테스크를 표현했다.
3-2 부슈, 그로테스크 문법의 탄생
부슈는 피셔처럼 소설 속 서술자가 해설하는 방식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객체로서의 사건 자체만을 과장했을 뿐이었고, 이로써 그의 작품속에 등장하는 죽음(흔하게 발생)은 긴장감을 주지 않는다. 부슈는 특정 주인공을 중심으로 작품이 설계되는 기존의 방식에서 벗어나 작가의 자유분방한 상상력을 중심으로 작품을 설계했으며, 또 상상력에 작품의 초점을 맞췄기 때문에 등장인물에게 발생하는 비극(죽음조차)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즉, 소설의 3대 요소인 '인물·사건·배경' 위에 '상상력'이라는 인터페이스를 만듦으로써 그로테스크함을 창조한 것이다. 이로써 부슈의 소설을 감상하는 독자는 인물이나 사건이 아닌 작가의 상상력을 따라가야 한다. 등장인물의 갈등과 사건은 참고사항일 뿐이다. 일단, 부슈의 그림책 "얼음 페터"를 감상해보자.
유난히 추운 1812년 겨울(실증적 정보) 페터는 어른들의 경고를 무시하고 스케이트를 타러 나간다. 그런데 바위 위에 앉아 스케이트 끈을 묶고 막 일어서려는 순간 바위에 얼어붙어 있던 바지가 찢어진다.(사소한 알고리즘 시작) 그 바람에 넘어진 페터는 얼음 한가운데 난 구멍에 빠지지만, 물에서 겨우 빠져나온 뒤 흠뻑 젖은 채로 계속해서 얼음을 지친다. 그러는 사이에 온몸을 적신 물이 차츰 고드름으로 변하고 마침내 페터는 "얼어붙은 호저"처럼 변해 그 자리에 멈춰 선다.
그로부터 몇 시간이 지나서야 페터를 발견한 아버지와 삼촌은 슬퍼하며 얼어붙은 페터의 몸을 집으로 옮겨 난로 옆에 세워둔다. 페터의 부모는 이윽고 얼음이 녹으며 서서히 아들의 모습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기뻐한다. 그러나 얼음과 함께 녹아내린 페터는 방바닥에 웅덩이처럼 고여 겨우 형체만 알아볼 수 있게 되어 버린다. 부모는 고인 물을 항아리에 퍼 담는다.
"그렇지. 그래! 돌로 만든 이 항아리에 페터를 퍼 담는다네."
"처음에는 돌처럼 굳었다가 버터처럼 흐물흐물 녹아 버린 페터를!"
얼음 페터의 마지막 장면은 가히 충격적이다. 텅 빈 지하실의 세 개의 항아리가 있는데, 왼쪽과 오른쪽의 항아리에는 각각 '치즈' , '오이'라고 적힌 딱지가 있고 한가운데는 '페터'라는 이름이 붙여져 있다. 마지막에 이르러 자식의 죽음을 슬퍼하며 간직하려는 부모의 심정과 겨울철 얼음호수가 위험하다는 것을 알리는 교훈적인 내용이 뒤섞이는데, 독자들은 감정의(웃어야 할지 심각하게 받아들일지) 갈피를 못잡는다. 뭔가 섬뜩한 조소가 나왔지만, 이를 해석하려 할수록 현실과 멀어진다. 그 이유는 부슈의 작품이 주는 '깊이감' 때문이다.
현실은 트리거(사건 유발), 사건으로 이뤄져 있다. 시간의 흐름은 일종의 방향이며, 방향은 사건을 통해 진행된다. 가령, 방금 태어난 아기가 아무런 움직임(사건)없이 100년 동안 멈춰있다가 그대로 죽으면 시간이라는 건 의미가 없다. 인간이 시간을 통해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구분할 수 있는 이유는, 현실이 동적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멈춰있다면, 시간은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간은 반드시 동적인 상황을 통해 생명력을 갖고, 또 사건들은 제각각 비중이 달라진다. '빵을 먹는 사건', '좋아하는 사람과 맛집에서 식사하는 사건'은 모두 '먹는다'라는 사건이지만 비중이 다르듯, 사람들은 가중치가 높은 사건들 위주로 하루를 설계하려 노력하고, 또 가치있는 인생은 가중치가 높은 사건들로 이뤄져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가중치가 높은 사건이 부정적인 결과로 치닫게 되면, 감정이 흐트려지며 이를 문제로 인식하여 해결책을 찾으려 노력한다. 그리고 부슈는 바로 이 부분(가중치)에 집중했다.
사람들은 소설을 읽으며, 인물에 감정을 이입한다. 그런데 소설 속 인물이 현실에서 생각하는 사건의 가중치와 전혀 다른 행동을 한다면 어떻겠는가? 중요한 사람과 식사를 하는데 대충 운동복 차림으로 나가서 손으로 허겁지겁 집어먹는다거나 혹은 고급 드레스를 입고 집에서 혼자 식사하는 장면이 계속 나타난다고 생각해보자. 이런 글을 읽는 독자들은 순식간에 낯설고 혼란스러운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3-2 낯설게 하기 「가중치 알고리즘」
부슈는 '낯설게 하기'의 대가였다. 그는 사람들이 심각하게 받아들이는(가중치가 높은) 사건은 가중치를 확 떨어뜨리고, 반대의 경우는 다르게 해석했다. 따라서 그의 소설 속 상황은 매번 순식간에 우스꽝스러운 사건으로 연결됐다. 만일, 우스꽝스러운 사건이 사람의 목숨과 같은 가치(현실에서 높은 가중치 사건)와 연관된다면, 해당 부분은 우스꽝스러움을 넘어 기괴한 느낌을 연출한다.
가령, '얼음 페터'에서 페터가 녹아서 죽는 사건은 현실에서 가중치가 아주 높은 사건(자식을 잃은 부모)이다. 반면, 식품을 짱아치로 저장하는 사건은 일반적으로 가중치가 낮은 사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터의 부모는 짱아치를 더욱 소중히 여기며, 페터가 녹아서 죽은 사건은 잠깐 슬퍼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리하여 독자와 작품 사이에는 엄청난 간극이 발생한다.
한편, 부슈는 다른 작품에서도 이 간극차의 수치를 조절하는 방식으로 작품을 이끌어가는 힘을 보여준다.
개똥벌레는 우리를 즐겁게 하지만
표범은 훨씬 덜한 즐거움을 준다네
위의 글귀는 표범이 흑인을 막 덮치려는 사나운 그림과 함께 실려있다. 표범이 사람을 죽이려는 사건은 가중치가 높은 사건인 반면, 표범이 사냥하는 장면에서 느낄 수 있는 '짜릿함'은 '인권'보다 가중치가 낮은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부슈는 늘 그렇듯, 즐거움이 인권보다 더 높게끔 책정함으로써 가중치를 바꿔놓는다. 따라서 부슈의 작품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은 작품이 갖는 사건의 특이한 가중치에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부슈의 작품 중에서 가장 완벽한 그로테스크 양식으로 꼽히는 것은 '에두아르트의 꿈'이다. 이 소설은 19세기 초에 발간된 보나벤투라의 '야경꾼'과 쌍벽을 이루는 19세기 말의 작품이며, 혁신의 기운을 느낄 수 있다. 잠깐 초현실적인 문학이 태동하는 시초가 된 부슈의 에두아르트의 꿈을 감상해보자.
이윽고 나는 느릿느릿 어느 중요한 도시를 향해 갔다. 도시 위로 솟은 뾰족한 탑과 연기를 내뿜는 굴뚝들을 나는 어제 이미 먼발치로 보았다. 오후의 급행열차가 다리를 지나 이쪽으로 돌진해 오고 있었다.
첫 번째 객실에는 사업을 끝내고 익명으로 외국을 여행하려는 노련한 사업가가 앉아 있었다. 두 번째 객실에는 수줍은 신혼부부 한 쌍이 타고 있었다. 세 번째 객실도 마찬가지였다. 네 번째 객실에서는 포도주 판매상 세 명이 각자 누굴 만나건 반복하는 레퍼토리를 늘어놓고 있었다.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객실에도 각각 세 명이 타고 있었다. 다른 모든 객실은 소매치기 일당이 차지하고 있었다. 이들은 어느 국제 음악 축제를 찾아가는 중이었다.
선로에 몇몇 사람들이 서 있었다. 절망에 빠진 노인, 모자도 없이 서 있는 어느 여인, 빈털터리 노름꾼, 희망을 잃은 한 쌍의 연인, 나쁜 성적을 받은 두 소녀였다. 열차가 지나가고 나자 역무원 하나가 다가와 그들의 머리를 주워 모았다. 그의 집에는 이미 머리로 가득 찬 바구니가 있었다.
위와 같이, 사건의 가중치를 달리하며 현실과 초현실을 넘나드는 부슈의 그로테스크 방식은 이후 초현실주의적 혁신으로 불리게 될 오토마즘(자동기술법)을 탄생시켰다.
4 현대의 그로테스크
그로테스크는 현대예술의 자양분이 되었다. 사실 현대적인 의미에서 그로테스크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냉전시대의 종말 이후, 언론매체가 폭발적으로 증가함에 따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작품이 쏟아졌고, 어느 순간 작품, 작가별로 그로테스크를 묶는 게 사실상 불가능한 수준이 되었다. 일본의 괴기문학, 영국의 고딕소설, 미국의 미스터리(공포), 등.. 현대적인 작품에는 대부분 그로테스크가 추구했던 특징이 묻어있다. '오컬트' , '좀비' , '유령' ,'멜랑콜리', 등.. 그 종류도 다양하게 나눠졌기에 괴기스럽다는 것 자체로 그로테스크를 표현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로테스크적인 분위기를 한껏 끌어올린 작가는 '카프카'다.
카프카의 그로테스크는 '잠복성' 혹은 '차가운' 그로테스크라 불린다. 카프카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은 특별하지 않고, 심지어 이름도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소설이란 장르의 특성상, 인물의 영향력을 배제한다는 것은 굉장한 핸디캡이라 할 수 있다. 가령, 히어로물 영화를 생각해보자. 'x맨', '스파이더맨', '배트맨', '토르', '원더우먼', '아이언맨' 등 히어로물 영화에서 캐릭터의 개성을 빼버리면 어떻게될까? 아마도 영화 전체 분위기가 사라져 버릴 것이다. 그만큼 논픽션 장르에서 인물의 개성이 차지하는 비율은 절대적이며, 심지어 인물(캐릭터)의 개성이 작품 전체를 대신하는 경우도 있다. 즉, 인물은 작품전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장치로 볼 수 있는데, 이와 같이 중요한 인물을 별 특색없이 만드는 작가가 있다면, 그 자체로 그로테스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카프카는 특별했다.
카프카는 인물에 집중하기보다 '세력'이라는 것을 만들어서 소설의 흐름을 진행시켰다. 명확하고 거침없이 묘사할 만한 부분은 없으며, 서술자의 설명도 부족하다. 심지어 결말은 흐지부지되며 인물과 사건은 사라진다. 이에 따라, 독자는 마치 꿈속 세계를 헤매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되고, 지속적으로 불투명하고 낯선 세력만이 자꾸 독자를 덮친다. 여기서 특이한 점은 카프카가 '세력'에 관해 정확하게 묘사했지만 자신조차 이 세력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이야기하지 않은 부분이다. 이로써 작가도 알 수 없는 분위기와 흐름만이 소설 전체를 관통하며, 인물은 끝내 별다른 비중이 없다. 정말 이와 같은 시도는 그로테스크 역사에서도 최초였다. 쉽게 말해, 카프카의 소설은 자신의 꿈을 이야기하고 있는 대학교수와 같은 느낌이었다.
5 잠복성 그로테스크
제 아무리 논리적인 사람일지라도 꿈속 사건을 이야기로 풀어내는 과정은 비이성적일 수밖에 없다. 원래 꿈에서는 자신조차 꿈속의 객체나 사건을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띄엄띄엄 묘사를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카프카의 소설은 발밑이 아득해지는 심연과의 마주침이나 세계가 무너지는 불안감 혹은 낯선 힘의 갑작스러운 출현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애초부터 낯설기 때문이다. 독자는 처음부터 그런 사실을 몰랐을 뿐, 뭔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늦은 뒤다. 예컨대, 이와 같은 방식을 '잠복성 그로테스크'라 한다면, 카프카의 소설은 잠복성 그로테스크의 전형이다. 카프카의 소설에서 감정이 개입되었어야 할 장면은 모두 흑백사진으로 처리된다.
가령, 카프카의 소설 '변신'에서 벌레가 된 자신을 그대로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장면은 믿을 수 없을만큼 냉담하다. 그래서 독자는 웃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는다. 등장인물이 전혀 아무렇지도 않게 사건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어디에 감정적인 가중치를 놓아야할지 전혀 판단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렇게 '차가움'과 '잠복성'을 동시에 실현한 작가는 카프카가 최초다.
그런데 카프카의 그로테스크가 혁신적이었기 때문에 이후 출현한 그로테스크 작가들의 상황은 평범해졌다. 카프카의 '잠복성 + 차가움'에 유머나 풍자를 더한 정도가 변화라면 변화였다. 따라서 그로테스크를 더욱 그로테스크하게 만드는 카드는 '초현실주의'밖에 없었다.
6 초현실주의와 결합한 그로테스크
분위기, 인물, 사건을 부슈와 카프카가 집대성하는 바람에 그로테스크 작가들에게 남은 도전은 '구성'이었다. 즉, 작품을 그로테스크하게 만드는 방법을 포기하는 대신, '작가의 상태'를 그로테스크하게 만드는 방법에 도전을 한 것이다. 이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방식은 '자동기술법'이라 불리는 오토마즘과 '이야기 짜깁기' 구성법이었다. '자동기술법'과 '이야기짜깁기'는 작품을 우연에 맡기는 방식으로써 1900년 중반 초현실주의 작가들이 주로 사용한 방법이었다. 오토마즘은 「라블레, 피샤르트, 랭보, 앙드레 브루통」에 의해 점차 교과서적인 초현실주의 기술법으로 발전했다.
한편, 오토마즘에 기반한 초현실주의 기법의 대표적인 작가로 '피샤르트'를 꼽을 수 있다. 라블레와 피샤르트는 '언어 그로테스크'를 창안했는데, 대략 다음과 같은 식이다.
그들은 춤추고, 밀치고, 날뛰고, 뛰어오르고, 깡충거리고, 노래하고, 뒤뚱거리고, 돌고, 소리치고,
흔들고, 밀어 대고, 발을 구르고, 감자 부대처럼 넘어지고, 떠밀고, 회전하고, 뛰놀고, 뜨거운 숨을 몰아쉬고 ....
시작은 일반적인 단어로 이뤄져 있지만, 이내 유의어와 유음어, 단어의 결합 등이 마구 남발되며 순식간에 언어가 뒤엉키며 언어가 언어를 창조하는 힘이 발현된다. 그리고 언어가 화자로부터 분리되는 혼란한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마치 정신이상자가 말을 하듯 언어가 뒤섞이며 기괴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급기야 이야기를 듣는 사람의 정신까지 휩쓸어버린다.
피샤르트는 언어가 충격적인 효과를 낼 때까지 맹렬히 수식어에 수식어를 더해 가는 식의 과정을 거쳤다. 이로써 지극히 평범하던 이야기는 마치 미지의 존재처럼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는데, 피샤트르는 '실재와 비실재', '섬뜩한 무', '웃음과 전율'을 자아내는 세계를 창조할 때까지 집중했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은 엉망으로 쓰여진 '시'와 딱히 구분되지 않는다는 단점(목표가 없는)이 너무나 컸다. 만일 스토리 전체를 오토마즘으로 구성한다면 시와 같은 상태가 돼 버리는데, 실제로 오토마즘은 앙드레 브루통과 랭보에 이르러 '시'로 변해버린다. 여기서 다시 한번 카프카의 위대함이 등장한다. 예술작품은 모두 일정한 구조를 갖고 있어야 하며, 그 덕분에 장르가 존재할 수 있다. 또, 이와 같은 장르가 존재하는 이유는 해당 장르에 열광하는 감상자(독자)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장르를 무시한 작품은 독자를 무시한 것과 같았고, 자동기술법, 의식의 흐름기법은 너무나 '화자' 중심이었기에 오토마즘은 핵심 독자층을 형성하지 못한 채, 현대시에 그대로 녹아들었다.
사실상 '구성'을 그로테스크하게 만드려는 시도(오토마즘)는 실패했고, 현재에 이르러 그로테스크는 '도구'에 연결되고 있다. 1910년대에 등장해 1920년대에 세력을 굳힌 초현실주의의 강세는 20세기 예술사 전반에 큰 영향을 줬다. 특히, 20세기에 발생한 두차례 전쟁은 예술의 경계를 무너뜨렸고, 장르의 경계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대혁신기를 만들어낸다. 이때 새롭게 등장한 도구가 '그래픽 아트'다. 화가는 '붓'외의 도구를 사용했고, 작가는 글이 아닌 영상과 만화로 표현했다. 그래픽 도구가 발전함에 따라 드디어 장르의 경계가 허물어진 셈이다. 화가도 작가라 불리고, 작가도 화가가 될 수 있다.(디지털 그림도구) 이와 같이, 과거보다 '몽환적'인 세계를 좀더 쉽고 빠르게 표현할 수 있는 시대가 되자(표현 그로테스크) 그로테스크의 흐름은 점차 '몽환적인 느낌'을 "표현"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른바 '표현 그로테스크'의 출현이다. 디지털 기술의 발전을 무시하던 작가들도 서서히 디지털 도구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이제 상향 평준화 된 디지털 기술을 중심으로 '표현'이 그로테스크의 중심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차이를 낼 수 있는 힘은 점차 기술적 표현으로 옮겨갔다. 같은 내용도 어떤 도구를 사용해서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완전 다른 작품이 되었다.
가령, 앙소르, 쿠빈, 파울 베버는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느낌을 포착해서 표현하는 방식으로 그로테스크를 자아냈다. 이들은 의식적인 상태에서 무의식으로 전환되는 순간을 포착하려 노력했다. 17세기 독일에서 유행한 환상적인 그로테스크는 작가가 적극적으로 환상적인 세계를 창조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현대에 이르러 환상에 접근하는 방식은 달라졌다. 작가가 적극적으로 세계를 창조하려는 움직임 대신 의식에서 무의식으로 전환되는 상태를 기다리며 발견하려 노력하는 방식이 대두되고 있다. 이러한 방식은 인위를 배제하고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초현실적인 심상에 집중하는 방식이다.(현대미술의 특징 및 오토마즘의 진보) 물론, 이 모든 발전은 기술적으로 진보한 다양한 도구와 함께 이전 세대의 그로테스크 장인들 덕택이다.
이제 그로테스크 작가들은 실행과 계획을 동시에 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현대적 의미에서 그로테스크 예술은 창작'하지'않고 창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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