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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과 문학에 나타난 그로테스크[볼프강 카이저.2019] [1] 16세기 그로테스크

by 도양강 2019. 11. 1.

그로테스크란 용어는 시대에 따라 용어가 진화했다. '그로테스크'는 현대에 이르러 "기괴함"이라는 의미로 사용되는데, "공포"와 더불어 "초현실적"이라는 의미가 첨가되었다. 『미술과 문학에 나타난 그로테스크』는 그로테스크의 역사를 시작으로 예술 그리고 사회와 문학에 영향을 준 그로테스크적 현상을 분석한다.

 

 

 


| 16세기 그로테스크

16세기, 그로테스크를 지칭하는 용어는 "화가의 꿈"이었다. 당시 사물, 식물, 동물, 인간의 영역에 대한 명확한 구분, 정역학의 질서, 대칭, 자연스러운 크기의 질서도 없는 그림을 그로테스크라 받아들였다. 16세기 유럽 각국은 새로운 예술양식과 더불어 그로테스크라는 명칭을 사용했는데, 초기 독일어권에서 사용된 '그로테스크하다'는 의미는 동물과 인간의 구분이 불명확한 괴수의 상징이었다. 당시 그로테스크 용어에 관한 인식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그로테스크(17세기) : '괴물', '기괴함'이라는 의미에서 벗어나 '우스꽝스러움' 의미. 
그로테스크(1694. 프랑스『아카데미 사전』): 표상적으로 우스꽝스럽고 기이하며 괴상한 것을 지칭.
예] 기이한, 야릇한, 괴상한, 제멋대로의 


 

17세기 프랑스에서는 기존의  그로테스크라는 용어에서 '섬뜩함'이 빠지며 '가벼운 웃음을 자아내는 우스꽝스러움'이란 용어로 변했다. 이후, 「그로테스크」를 '얕보고 괴상하거나 저급한 익살'로 취급하는 경향은 한동안 유지됐다. 대표적으로 1]자크 칼로(1592~1635)의 예술을 그로테스크의 전형으로 들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오늘날 고야와 예술적 맥락을 같이하는 화가로 해석되는 자크 칼로의 작품이 17세기 당시 우스꽝스러운(그로테스크함) 예술로 취급되었던 것이다.

바야흐로 18세기의 그로테스크 개념은 미학적 범주를 확립하며 그 외연이 더욱 확장되기 시작한다. 특히, 18세기에 등장한 캐리커처는 당시 미학 사조의 핵심이던 '특징화'를 발전시켰고, 그로테스크는 캐리커처의 영향에 힘입어 미학 사조의 흐름에 편입된다. 이때 그로테스크는 두 가지 부류로 나눠졌는데, 하나는 프랑스어권이 인정하는 아래와 같은 의미였다.

 


1. 화가가 느끼는 그대로의 왜곡된 현실을 재현


2. 화가가 특정한 의도로 대상의 괴상함을 과장하되

자연적 형태에 바탕을 둠으로써

원래 모습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과장된 형태

 


 

반면, 빌란트(18세기 캐리커처 이론가)에 의하면 그로테스크는 현실에 더 이상 종속되지 않는 상태에서 모방이 아닌 '거친 상상력'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며, 화가의 머릿속에서 탄생한 것이다. 빌란트가 정의하는 그로테스크의 의미는 다음과 같았다.

 


그로테스크 : 순전히 화가의 상상에 의해 창조된, 혹은 사실성이나 유사성에 얽매이지 않고 오로지('지옥의 브뤼헐'작품처럼)거친 상상력에 스스로를 내맡기며, 자신의 머릿속으로부터 탄생한 초자연적이고 모순된 형상을 괴기스러운 작품으로 재창조해 냄으로써 의도적으로 보는 사람의 조소와 혐오감, 충격, 냉소를 불러일으킴


 

그로테스크에 관한 빌란트의 분석은 관찰자가 갖는 심리적 영향력을 짚어냈다는 측면에서 상당히 의미가 있는 해석이다. 그로테스크 작품을 분석할 때, 보통 기형적인 형태와 그 기괴함을 강조하는 데 반해 빌란트는 현실세계가 파괴되며 발밑이 아득해지는 듯한 충격과 섬뜩함,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당혹감을 감상자의 근본적인 감정으로 해석했다는 점이 놀라운 점이다. 왜냐하면, 현대적으로 해석되는 그로테스크의 정의 역시 빌란트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관찰자가 느끼는 충격을 현실세계의 파괴에 당면해 느끼는 당혹감으로 본다면 그로테스크는 인간세계와 은밀한 관계를 맺는 동시에 일정한 '사실성'을 부여받을 수 있다. 예술분야에서는 예술을 자연의 모방으로 보는 원칙적 태도가 있기때문에 그로테스크를 순전히 크리에이터의 주관적 상상력으로 치부한다면 원칙적 태도에 위배될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이 파괴되는 상황을 그로테스크와 연결한다면, 자연의 모방(현실도 자연의 일부)이라는 점에서 예술적인 범위가 확대된다. 빌란트는 300년 전에 이를 깨달았던 셈이다.

 

 

 

 

 


| 그로테스크 목표: 망연자실

빌란트에 의하면, 그로테스크는 심연과 모순의 세계를 창조한 것이다. 그림 앞에서 감상자가 느끼는 '망연자실감'은 모든 종류의 그로테스크 작품에 드러나는 본질적 특성이며, 창작자가 작품에 어떤 의미도 부여하지 않은 채 불합리한 것을 불합리한 모습 그대로 보여주는 것을 의미한다. 빌란트가 보기에 그로테스크는 섬뜩한 환상의 세계였다. 그래서 빌란트는 전반적인 16세기 그로테스크 예술사조의 기괴함과 공포 이미지를 '초현실적'느낌으로 재창조(발견)했다. 이는 현대에 이르러 발전한 그로테스크의 개념과 일치하기에 빌란트의 분석은 무려 300년을 앞서간 것이었다.

 

지금까지 그로테스크의 의미를 해석하자면 다음 3가지 키워드가 핵심이다.

 


1] 생경함: 현실의 토대를 갖고 있지만 현실과 명확히 다른 낯설음이 특징 
2] 무질서: 현실의 부조리, 모순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면 무질서가 된다
3] 파괴: 초현실적인 힘에 의해 가상의 공간이 무너지며, 감상자는 망연자실을 느낌


 

 

그로테스크는 흡사 '즉흥재즈'와 유사하다. 즉흥재즈는 기존의 음계를 파괴하며 즉흥적인 무질서를 창조하기에 낯선 느낌을 만든다. 이렇게 무질서가 무너져내리는 가운데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음계가 다시 생경함을 창조한다. 그로테스크에서는 이미 17세기부터 2]코메디아 델라르테의 즉흥대사와 같은 즉흥재즈식 공연이 펼쳐졌다. 하지만 현대예술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당시의 즉흥적 방식은 곧바로 주류예술계의 반발을 샀다. 주류예술계는 그로테스크를 우스꽝스러운 광대놀음 정도로 취급했다.

 

하지만 그로테스크 작가들의 생각은 주류 예술계와 상이했다. 18세기의 대표적인 그로테스크 희곡작가였던 '3]렌츠(Jakob Michael Reinhold Lenz)'의 경우, 희극을 단순히 웃음을 자아내거나 눈물을 자극하는 연극 정도로 해석하지 않았다. 그에게 희극이란, '희극적인 동시에 비극적'이어야 했다. 이는 당시 주류예술이 그로테스크를 단순히 해학극이라 평했던 것과 달리 그로테스크 방식이 예술로써 깊이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렌츠는 늘 기괴한 것을 추구했고, 이를 통해 끊임없는 즐거움을 관객에게 선사했다. 가령, "신 메노차"의 경우, 등장 인물들의 이름부터 모순이다. "폰 비덜링(올바른 체하는) 부부", "카멜레온 백작, 폰 초프(현학자)", "치어라우(멋쟁이)" 등.. 렌츠는 극명한 대비를 통한 모순 그리고 혼란을 만들며 관객을 심연의 세계로 초대한다. 잠시 "신 메노차"에 나오는 대사를 감상해보자.

 


빌힐마네 : 전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비덜링 씨 : 아니, 절대 안 돼(발을 쾅쾅 구르며)난 네가 독신으로 살기를 바라지 않아.

내가 세상에 태어나 한다는 일이 고작 네 행복을 가로막는 것뿐이라면,

차라리 열매도 맺지 못하는 저 늙은 나무를 베어 버릴 테다!

그렇지 않습니까, 왕자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왕자: 내게 대답을 요구하다니, 잔인하군요. 

이런 고통을 참는 방법은 침묵뿐이건만.

(힘없는 목소리로) 영원히 침묵하고 벙어리가 되는 것 말입니다.(자리를 뜨려 한다.)

빌헬미네:(황급히 왕자를 잡아 세운다) 저는 당신을 사랑해요.

왕자: 저를 사랑한다고요!(빌헬미네의 발밑에 기절하며 쓰러진다)

빌헬미네 : (왕자에게 쓰러지며) 아, 이분 없이는 도저히 살 수 없을 것 같아요.

비덜링 씨 : 옳지! 그가 깨어나도록 입에 한 방 먹여 줘라.


 

렌츠의 극본 "가정 교사" 의 내용 역시 '신 메노차'와 비슷하다.

 


로이퍼 : 이제야 수수께끼가 풀리는구나!(아이를 받아 안고 거울 앞에 선다) 
이게 어떻게 내 모습이 아니란 말인가?(정신을 잃고 쓰러진다. 아이가 울기 시작한다)

마르테: 정신 차리세요!.... 도움을 청해야겠군. 어디가 아픈 모양이야.


 

렌츠의 희곡에 나오는 대사는 뭔가 기괴하다. 그 이유는, 극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매번 일반적인 행동법칙에 위배되는 부분을 갖고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등장인물들의 행동에는 어떤 보이지 않는 힘이 영향력을 발휘하는 듯 느껴진다.(기괴함) 렌츠는 이렇게 행동을 유발하는 도구로써 '심심찮은 우연'을 적극 활용했다. 매 상황의 극명한 대비효과는 렌츠가 추구한 특징이었다. 

 

가령, '신 메노차'에서 빌헬미나와 왕자는 결혼했다.(평범한 동화 이야기) 하지만 이들은 결혼한 지 사흘만에 제 3자로부터 자신들이 남매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고, 왕자는 절망에 빠져 도망쳐버린다. 왕자의 결혼에 축제까지 열렸던 상황은 순식간에 죽음의 무도회가 돼 버린 셈이다.(극명한 대비와 모순) 이후, 왕자는 4]라이프치히의 걸인, 불구자들을 위한 축제에 등장하는데, 이때 어느 불구자가 다리를 절며 왕자에게 다가오는 장면은 렌츠가 추구한 극명한 대비(망연자실)와 함께 현실이 무너지는 아득함을 극대화한다.

 


(잔을 높이 쳐들며) 만세! 만세! 만세! (왕자에게)존귀한 왕자님이시여!
(술을 마신다. 왕자, 재빨리 퇴장)
모두 함께: 존귀한 왕자님이시여!(유리잔을 창밖으로 던진다.)


 

존귀한 왕자와 내던지는 술잔. 이런 광경들은 렌츠의 희곡이 갖는 일반적인 특징이다. 당시 연극은 관습에 따라 24시간 안에 한 장소에서 하나의 줄거리만을 다뤄야 한다는 '삼일치 원칙'을 지켜야 했다. 하지만 렌츠는 삼일치 법칙을 완전히 무시했다. 렌츠의 연극에서는 여러 개의 줄거리가 다발로 엮었고 게다가 모순적이었다. 이와 같은 렌츠의 방식(극명한 대비)은 이후 클링거(Friedrich Maximilian Klinger)에 이르러 절정에 달했다. 사람들은 클링거의 작품에 등장하는 극단적인 인물들의 대사와 행동에 관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고, 어리둥절한 채 그냥 그대로 앉아 있었다고 한다. 클링거의 '질풍 노도'가 당시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잠시 살펴보자.

 


(흑인, 블라지우스의 코를 잡아당기고 막 글을 쓰려던 라 푀의 등 뒤에 서서 방해한다)
라 푀: 자네의 눈은 아름답게도 빛나는군! 히히.
블라지우스 : 흠! 버릇없는 놈팡이들 같으니!

선장 : 신사분들, 여러분과 인사를 나누었으면 합니다. 군인들이신가요?

블라지우스 : 나는 아무것도 아니오.(잠든다)

선장: 그거 아주 풍부한 정보군요. 그러면 당신은?

라 푀 : 모든 것이죠.

선장 : 그건 부족하군요. 이쪽으로 오시오, 모든것 씨. 

몸을 좀 풀 겸 권투를 하려던 참이거든요.(라 푀를 잡아끈다)


 

렌츠의 "질풍노도"에 등장하는 괴상한 언어와 동작 그리고 무작위로 펼쳐지는 장면들은 무시무시한 느낌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괴기스러움과 생소함을 만들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이로써 작품을 감상하려했던 관객들은 마음껏 웃지도 못하는 상황에 처했다.(아득한 느낌) 당시 렌츠의 공연이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아래와 같은 한 구절이 말해준다.  

 

"관객이 배우를 보며 웃는 게 아니라 어쩔 줄 모르는 관객을 보며 배우가 웃는 상황이 되었다"

 

 

 

 

 

 


1] 자크 칼로 : 자크 칼로 (Jacques Callot, 1592년 – 1635년)는 바로크 화가이며 로렌 공화국 출신의 화가이다. [1] 그는 군인, 술 주정꾼, 집시, 거지, 그리고 법정 모습등1400개 이상의 작품을 만들었다. 종교적이며 군대적인 모습들과 그런 전경들을 그렸다.

 

2] 콤메디아 델라르테 : 콤메디아 델라르테(Commedia dell'arte)는 16세기에서 18세기 사이에 이탈리아에서 유행한 즉흥극이다. 오늘날에도 하나의 연극형태로 남아있다. 공연의 구성원은 10명 정도이며, 대본없이 열린공간에서 무료로 공연된다. 소품은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3] 렌츠 : 야콥 미하엘 라인홀트 렌츠는 독일의 시인이자 극작가이다. 쾨니히스부르크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1771년 스트라스부르에서 괴테를 사귄 후, 그를 따라 바이마르에 갔다(1776). 그 후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상태로 모스크바로 가서 거기서 사망하였다. 그는 질풍노도시대, 즉 천재시대의 전형적인 작가로, 그 이념과 이상적 형식을 희극 『가정교사』 Der Hofmeister(1774)와 『군인들』 Die Soldaten(1776)로 표현했다. 그의 서정시 및 만년의 극작, 철학적 논문은 독일 낭만주의로의 길을 열었다. 이 비극적 인물에 대해 나중에 뷔히너는 렌츠라는 소설을 썼다.

 

4] 라이프치히 : 라이프치히는 독일 작센 주의 가장 큰 도시이다. 라이프치히의 인구는 제2차 세계 대전 전에 750,000명으로 역사상 정점을 지나 2002년 현재는 약 50만 명이다. 통일 이후 BMW와 포르쉐가 라이프치히에 공장을 신설하면서 자동차 공업이 성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