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심리학

자기다움 [ 권민 .2012 ] 평범한 삶과 죽음 그리고 착각

by 도양강 2019. 4. 21.

| 평범한 삶과 죽음 그리고 착각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유일한 브랜드였지만 죽을 때는 대부분 그 누군가의 복사본으로 생을 마친다. 이와 같이 우리를 복사본으로 만드는 것은 놀랍게도 현재의 교육, 직장, 시장 그리고 대중 미디어들이다. 교육은 특별한 사람을 평범한 사람으로 만든 후 그 중에서 제일 뛰어난 사람을 순위로 평가하는 시스템이다. 또, 직장은 특별한 사람들을 모아 평범한 일을 하도록 강요한다. 그리고 시장은 대중, 유행이라는 거대 시장을 만들기 위해 대중적 취향이라는 집단 히스테리를 일으킨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기다움'이란 존재하기 힘들다. 

 

 

 

| 남과 같아지기 위해 살아가는 존재

만일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을 자녀에게 인수인계한다고 생각해보자. 자녀에게 일을 가르쳐 주었을 때 당신의 뜻을 이해하고 따르겠다고 말할까? 만일 그렇다면, 자녀에게 가장 먼저 무엇을 가르쳐주고 싶은가? 내 아이가 이 일을 하도록 한다면 적어도 돈 버는 기계(부하직원)처럼 만들지는 않을 것이다. 아이가 돈을 앞세우는 즉시, 돈이 중요한 게 아니고 이걸 꼭 배워야 한다고 말할 부분이 있을 것이다. 

 

예컨대, 마더 테레사는 이 세상에 천박한 직업은 없지만 천박한 사람은 있다고 했다. 일을 통해 자기다움을 구축하고 싶다면, 먼저 남과 같아지려는 습관부터 고쳐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중 매체의 화제성 정보를 차단할 필요가 있다. 베스트셀러, 추천앱, 인기가요, 게임 등... 알고리즘에 의해 추천되는 것들은 대개 찌꺼기다. 자신만의 틀을 세우기 위해서는 새벽과 같은 혼자만의 시간을 만들어 스스로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시간이 중요하다. 만일, 불안한 나머지 대중매체가 던져주는 취향을 그대로 따른다면 우리는 영원히 '많은 이들 중의 하나'로 남아 무덤에 짝퉁으로 묻힐 수밖에 없다. 

 

"나는 부속품이 아니라 완성품이다"

"나는 복사본이 아니라 원본이다"

 

내가 진짜인지를 증명하라. 스스로 질문을 던지며, '온전한 나 자신'이 아닌 '대중'으로 살아가기를 거부하자. 우리는 누군가의 복사본으로 죽기를 거부할 의지가 있다.

 

인간 개개인은 세계 유일한 존재이며 유일한 삶을 살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과 맞추기 위해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희석한다. 어느 순간 자신의 생각을 접기 시작하고, 결국 잉여인 혹은 여분의 사람으로 전락하려 스스로 노력하게 된다. 즉, 점점 버려질 수 있는 존재가 되어가는 것이다. 이는 아프리카의 '스프링 벅'과 같다. 스프링 벅들은 강가로 몰려가 무리지어 자살한다. 그 이유는 사자에게 쫓겨서가 아니다. 어처구니 없게도 서로 앞에 있는 새 풀을 먼저 먹겠다고 앞다퉈 뛰어가다 결국 멈추지 못해 당하는 대참사이다. 또, 레밍 역시 이와 비슷한 떼죽음을 맞이한다. (일명 나그네쥐) 레밍은 특정한 때가 되면 호수나 바다에 뛰어들어 집단 자살을 하는데, 그 이유는 레밍이 먹는 노르웨이 풀 때문이다. 노르웨이 풀은 레밍의 소화액을 중화시키는 액체를 만든다. 만약 레밍들이 풀의 양을 적게 섭취하면 풀들은 중화액을 생산하기 시작한 지 약 30시간 후 액체 생산을 중단한다. 그러나 레밍이 증가하면 풀들의 중화액 생산도 계속 증가하기 시작하며, 결국 중화액 때문에 소화가 잘 안 되는 레밍은 소화를 위해 체내에서 더 많은 소화액을 생산하다 체력이 고갈되어 굶어 죽기 직전의 상태에 이른다. 이렇게 레밍은 풀을 많이 먹을수록 더욱 허기가 져서 인근 툰드라 지대의 풀들을 모두 먹어치운다. 그렇게 풀이 고갈되면, 레밍은 호수나 바다의 가장자리에 도달하게 되는데, 이때 허기를 느끼고 다시 물 건너에 있을 새로운 풀을 향해 돌진하다 집단 사망에 이른다.

 

 

 

 

 

| 강요된 욕구

레밍, 스프링 벅들이 바보같은가? 그런데 인간 사회도 이들과 비슷하다. 우리는 벌어도 벌어도 계속 허기가 지는 사회 속에 살고 있다. 도시 문명은 재화를 통해 사람들을 계속 배고프게 만들고, 이로써 경쟁하게 만든다. 결국 우리는 끊임없이 경쟁하며 허기가 져서 마지막 건너편의 풀을 향해 뛰어가게 된다. 도시인에게 '죽음'이란, 이름없는 짝퉁인생의 종착역이다. 모두 똑같은 것을 갖고 싶어하고, 비슷한 삶을 추구할 뿐이다. 

 

자기다움을 찾지 못한 인간은 산송장 같은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10대, 20대, 30대의 삶은 모두 비슷하며, 심지어 은퇴 이후의 삶도 똑같다.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의 삶을 우리는 그렇게 서로 닮아간다. 또, 건너편 풀을 갈망하며 결국 버려진 채로 삶을 마무리한다. 

 

 

 

 

| Call my name

삶이 끝나기전에 자신의 이름을 불러라. 그때 비로소 인생이 나에게 다가온다.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는다면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불러야한다. 나는 나다. 그리고 우리들은 모두 자신의 이름이 불려지기를 원한다. 어딘가의 기준에 맞춰 그 기준을 위해 원본으로서의 인간을 포기하는 청춘, 광고나 정책에서 말하는 열정과 꿈 그리고 비전은 필요없다. 누군가에 의해 맞춰진 버전은 또다른 스펙경쟁을 만들 뿐이다. 이는 복사본의 인생이며, 복사본은 언제든지 폐기될 수 있다. 복사본들은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은 내일을 살아간다. 그들은 잔존하기 위해서 생존하고, 자기다움이란 가치를 위해 모험하지 않는 인생이다.

 

인생은 결코 두번 반복되지 않는다. 그래서 복사본 인생은 시간이 갈수록 결국 남과 비슷해져 잔존 가치가 사라진다.이는 스스로 결정한 안락사와 같다. 

 

사람은 동물과 다르다. 심장이 멈춰 뇌사가 인정되어야만 안락사가 되는 게 아니다. 닳고 닳아 남들과 같아지고 비슷해져 복사본과 같은 상태에 이르면 그것이 바로 사회적인 안락사이자 사회적 사망선고다. 심장만 뛸뿐, 그것은 죽은 것과 같다. 여전히 배고픈 레밍처럼 뭔가를 더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면, 잠시 멈춘 뒤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보자. 

 

이대로 가면 나는 어디에서 멈추게 될까?

 

돈벌이를 제외한다면, 왜 지금 하고 있는 일을 해야만 하는지 마땅히 설명할 수 있는가? 설명할 수 있다면 자기다운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만의 세계를 설명하지 못한다면 다른 사람이 묘사한 세계에 죽을 때까지 머무를 수 밖에 없으며, 또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해야 하는 이유가 없다면 이 세상에 있을 이유도 사라진다.

 

 

 

 

 

| 자기다움을 구축하는 방법 = 앓음다움

자신의 약점을 굳이 강점으로 바꾸려 할 필요는 없다. 약점은 상황과 사람에 따라서 강점이 되기도 하고 약점이 되기도 한다. 사람들이 강조하는 '사랑과 같은 감정', '사회적 기능', '친밀한 관계'는 필요에 따라 달라진다. 뜨겁던 연애시절, 강점이었던 자상함은 사랑이 식어버린 후 '우유부단함'으로 바뀐다. 인간의 감정이란 믿을 게 못 된다.(감정에 호소하는 사람을 조심하라) 세상에 영원한 건 없다. 누구와 함께 하고, 직업과 목표에 따라서 약점이 강점이 되기도 하고 약점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자신이 완전할 수 있는 분야를 찾는 편이 유리하며,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나다움'을 구축할 수 있는 지식이다. 

 

자기다움을 안다는 것은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소중한 것을 의미하며, 이에 관해 답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자기다움은 자신의 생명을 걸 만한 수준의 가치가 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은 자신의 생명인데, 자신의 생명만큼 가치 있는 것을 찾는 것이야말로 바로 자기다움을 구축하는 첫 번째 발걸음이다. 즉, 자기다움은 자신의 생명과 동일한 것을 찾는 것이다. 

 

 

 

 

| 추구하는 가치 찾기

자기다움을 위해서 먼저 추구하는 가치를 찾아야 하는데, 구체적인 방법은 '쓰기'다. 우선, 포스트잇에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 3가지를 작성한다. 10분 후, 그 중의 하나를 찢는다(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그리고 왜 찢었는지 자문한 뒤, 이를 기록한다. 이를 통해 가치에 대한 우선순위를 정할 수 있다. 똑같은 방법으로 나머지도 찢는다. 이렇게 마지막 남은 하나의 가치를 설명하다보면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가 진짜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이제 하나 남은 가치를 위해서 지난 일주일 동안 자신이 어떤 일을 했는지를 생각해본다.

 

과연 '나'는 '나답게' 살고 있는가? 

 

마케팅의 구루였던, 필립 코틀러는 '마켓3.0'에서 영혼이 있는 기업이 되기 위한 기업의 세번째 신조로서 '가치를 명확히 천명하고 그것을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왜일까? 그것을 포기하면 기업의 존재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가령, 스타벅스는 '인간의 정신에 영감을 불어넣고 더욱 풍요롭게 한다는 가치를 추구한다. 이를 위해 이웃에 정성을 다한다. 어떤 기업이라도 추구하는 가치를 지키지 못하면, 이윤추구를 위해 깜짝 등장했다 없어지는 평범한 것들과 차이가 없다. 

 

 

 

 

 

| 감사노트 작성

자기다움을 위해 주말에는 감사노트를 작성하자. 매일 감사노트를 작성하면 더욱 좋다. 만일 지금이 힘들다면 현재 상황이 하나의 영화 속 장면이라 간주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자신이 주연임을 당당하게 시나리오 노트에 기록한다. 만일, 이러한 상황에 직면한 캐릭터는 과연 어떻게 할까? 시나리오에서 주인공은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할 것인가? 이렇게 스스로에게 배역을 준 뒤, 세상이 모두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을 느끼며 주변인들을 의식하다보면, 좀더 책임있고 프로나 전문가다운 행동을 할 수 있다. 

 

그리고 '감사 or 시나리오 노트'를 작성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새벽에 일어나야 한다. 새벽시간이 좋은 이유는, 새벽 시간은 영원히 살 것처럼 착각하는 우리에게 시간의 한계를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다. 세상의 시간은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흘러가는 시간인 '크로노스'이며, 나머지는 의미 있는 시간인 '카이로스'이다. 그런데 새벽 시간을 그냥 흘러가는 크로노스처럼 쓰는 사람들이 많다. 새벽 시간을 추가된 냉면 사리처럼 덤으로 쓰면 사실상 아무런 의미가 없다. 거인과 평범한 사람의 차이는 바로 여기에 있다. 거인들은 남들이 '크로노스'처럼 사용하는 시간을 '카이로스'처럼 사용하는 달인이다. 특히, 그들은 하루의 30%에 해당하는 새벽 시간을 카이로스로 만들어 사용한다. 결국, 시간을 잘 사용하는 것에 따라 인생이 갈린다. 청소년기에도 시간을 카이로스로 사용했는지 크로노스로 사용했는지에 따라서 우리는 달라졌다. 

 

 

 

 

 

| 나는 배운다


나를 사랑하게 만들 수 없다는 것을 나는 배웠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 되는 것뿐이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선택이다.

내가 아무리 마음을 쏟아 다른 사람을 돌보아도

그들은 때로 보답도 반응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배웠다.

 

신뢰를 쌓는데는 여러 해가 걸려도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이라는 것을 배웠다.  

인생은 무엇을 손에 쥐고 있는가에 달린 것이 아니라

믿을 만한 사람이 누구인가에 달려있음을 나는 배웠다.

 

우리의 매력이라는 것은 15분을 넘지 못하고

그 다음은 무엇을 알고 있느냐가 문제임도 나는 배웠다.  

다른 사람의 최대치에 나 자신을 비교하기보다는

내 자신의 최대치에 나를 비교해야 한다는 것을 나는 배웠다.

 

그리고 또 나는 배웠다.

인생은 무슨 사건이 일어났는가에 달린 것이 아니라

일어난 사건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을..

무엇을 아무리 얇게 베어낸다 해도

거기에는 언제나 양면이 있다는 것을 나는 배웠다.

 

나는 배웠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사랑의 말을 남겨 놓아야 한다는 것을..

어느 순간이 우리의 마지막의 만남이 될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해야 할 일을 하면서도 그 결과에 대해서는

마음을 비우는 자들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영웅임을 나는 배웠다.

 

사랑을 가슴 속에 넘치게 담고 있으면서도

이를 나타낼 줄을 모르는 사람들이 있음을 나는 배웠다.

 

나에게도 분노할 권리는 있으나

타인에 대해 몰인정하고 잔인하게 대할 권리는 없다는 것을 나는 배웠다.

 

우리가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진정한 우정은 끊임없이 두터워진다는 것을 나는 배웠다.

 

그리고 사랑도 이와 같다는 것을..

내가 바라는 방식대로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해서

나의 모든 것을 다해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는 것이 아님을 나는 배웠다.

 

또 나는 배웠다.

아무리 좋은 친구라고 해도 때때로 그들이 나를 아프게 하고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들을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타인으로부터 용서를 받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고

내가 내 자신을 때로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나는 배웠다.

 

나는 배웠다.

아무리 내 마음이 아프다고 하더라도

이 세상은 내 슬픔 때문에 운행을 중단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배웠다.  

환경이 영향을 미친다고 하더라도 내가 어떤 사람이 되는가 하는 것은

오로지 나 자신의 책임인 것을 나는 배웠다.

 

나는 배웠다.

우리 둘이 서로 다툰다고 해서 서로가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님을..

그리고 우리 둘이 서로 다투지 않는다고 해서

서로 사랑하는 게 아니라는 것도 나는 배웠다.

밖으로 드러나는 행위보다 인간 자신이 먼저임을 나는 배웠다.

 

두 사람이 한가지 사물을 바라보면서도

보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는 것도 나는 배웠다.

 

그리고 또 나는 배웠다.

앞과 뒤를 계산하지 않고 자신에게 정직한 사람이

결국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서 앞선다는 것을..  

내가 알지도 보지도 못한 사람에 의하여

내 인생의 진로가 변할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배웠다.

 

나는 배웠다.

이제는 더 이상 친구를 도울 힘이 내게 없다고 생각할 때에도

친구가 내게 울면서 매달릴 때에는

여전히 그를 도울 힘이 나에게 남아 있음을 나는 배웠다.

글을 쓰는 일이 대화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 마음의 아픔을 덜어준다는 것을 나는 배웠다.

 

나는 배웠다.

내가 너무나 아끼는 사람들이 너무나 빨리

이 세상을 떠난다는 것을..

 

그리고 정말 나는 배웠다.

타인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는다는 것과

나의 믿는 바를 위해 내 입장을 분명히 한다는 것.

 

그러나 이 두 가지 일을 엄격하게 구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 나는 배웠다.

 

나는 배웠다.

 

사랑하는 것과

사랑을 받는 것의 그 모두를..

 

-오마르 워싱턴-